할머니의 뜨개를 소환하다

뜨개질은 취미이기도 하고 직업이기도 하고 예술적인 창작의 과정이기도 하다.

태교로 본격적인 뜨개질을 시작한 나에게는 기다림의 시간이자, 작은 바램을 실어 떠내려가는 기대감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뜨개질은 다양한 편물을 반복적으로 만들기로 이어졌고(특히, 아이들을 위한 모자와 카울은 얼마나 떴는지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 해마다 겨울이 되기 전 의식처럼 진행할 정도로 일상의 익숙함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기대치 못한 다른 기능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답답하고 꽉 막힌 대화만이 오고가 마음이 지칠 때는 가방에 넣어둔 바늘을 쓸쩍 꺼내잡고 실을 여유롭게 돌려 감으며 코를 늘이기 시작한다. 대화에서는 한 걸음 물러서게 되지만 잘 들어주며 곁을 지켜주는 과묵함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무언가에 막혀 출구를 찾지 못할 때 뜨는 작은 도일리 한 장은 머리를 식히는 휴식의 시간일 뿐아니라 그 쓰임이 있고, 주변을 아름답게까지 하니 나름의 매력이 있다.

물론 뜨개질만이 오직 나의 취미이지는 않았다. 실과 바늘을 만지며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즐거움은 자수나 재봉 같은 다른 작업들에도 이어지는 확장의 기능도 발휘하였다. (실을 만진다는 공통점을 지녔다는 점에서 어쩌면 일맥상통함이 있을런지 모르겠다.)

이런 나의 뜨개질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뜨개질을 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생각하다 보니,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80년대 초 오래 된 추억을 꺼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촌스러운 외모에 빨간 내복을 입은 주인공이 등장할 법한 옛 TV 드라마를 떠올리면 딱 맞을 것 같다. 나의 재능 많으신 친할머니께서는 해마다 세 손녀들에게 매서운 겨울을 나게 할 실내복을 떠주셨다. 비교적 큼지막하게 떠진 것은 내 것이 되고,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의 것이 되고, 동생의 것은 다시 막둥이의 것이 되었다. 그러다 막둥이도 입지 못하게 된 실내복은 시원하게 해체된다. 그런 일이 있을 때면, 나는 매번 할머니의 해체 작업에 불려가는 1순위 숙련된 조수였다.

내가 한 쪽 귀퉁이에서 시작해서 올을 풀어 내려가면 할머니는 두 다리를 벌려 무릎을 세우시고 꼬불꼬불한 실을 재빨리 양쪽 발끝에 걸어 감아 큰 실타래를 얻으셨다. 막둥이에게도 작아진 옷 두 벌은 이런 해체 작업을 거쳐 부엌 한 켠의 찜통으로 옮겨서 뜨거운 증기에 수 분간 쪄진다. 이 과정을 거쳐나온 실은 놀라울 정도로 곧고 가지런한 새 실로 다시 태어났다.

재생된 실에 새 실을 더해 다시 짜여진 실내복은 때로는 온갖 색이 균형없이 뒤섞이고 이어져 볼 품 없는 결과물이 될 때도 있다. 그렇더라도 자원이 귀한 그 시절 겨울내내 온돌없는 대청마루를 뛰어다니는 손녀들을 따뜻하게 유지해주는 최고의 공신은 역시 할머니의 헨드메이드 실내복이었다. 이렇게 할머니의 뜨개작업은 수년간 대 성공을 누렸다. 그러다 손녀들은 하나둘 자라 더이상 그 화려한 옷을 입기 거부했지만, 나는 그 이후에도 여전히 왼손에 검지에 실을 걸어 속도감 있게 떠내려가는 할머니의 뜨개질을 연신 신기에 가깝게 다 칭하며 쉴 새없이 바라보곤 하였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한참이 지난 지금의 나는 할머니와 같은 왼손 손가락에 실을 걸어 감아 텐션을 유지하며 쌍둥이 같이 똑같은 그립(grip)으로 뜨개질을 하고 있다.

–>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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